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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증명하는 북한의 도발 잔혹사

안녕하세요!

며칠 전, 인터넷에서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시민들이 답하는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우리의 안보 현실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참 씁쓸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보면 알 수 있듯,우리는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 상태인 나라입니다.
평화로운 일상에 가려져 잠시 잊고 살 뿐, 결코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한 상황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과거 북한이 감행했던 수많은 기습 공격과 포격 속에서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영웅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을 눈물로 살아가는 유가족들이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데,
안보를 너무 가볍게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보면 실망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누리는 이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북한이 대한민국에 어떤 아픔을 남겼는지 그 '사실'만큼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수많은 우리 장병들과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으로 기록된 가슴 아픈 실제 역사.
오늘은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휴전 이후 북한이 대한민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도발했던 주요 사건들을 날짜와 팩트 중심으로 차분하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육용으로 보여주기에도 좋고, 우리 스스로 안보 의식을 다잡기에도 좋은 내용이니 꼭 끝까지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1.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 6·25 전쟁의 시작 (1950년)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역시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 전 전선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국지도발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지구상에서 없애려고 했던 전면적인 불법 침략 행위였습니다.

당시 우리 군은 제대로 된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북한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죠.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후 UN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성공했지만, 중공군의 개입 등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수많은 이산가족과 고아가 양산되었으며, 국토는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평화가 얼마나 많은 선열들의 피와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2. 청와대를 노린 칼날, 1·21 사태 (1968년)

세월이 흘러 1960년대 후반, 북한은 더욱 대담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도발을 감행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 일명 1·21 사태입니다.

북한은 정찰국 소속의 최정예 특수부대원(124군 부대) 31명을 선발해 혹독한 훈련을 시킨 후, 야간을 틈타 휴전선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군 복장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이들은 서울 시내, 청와대 인근인 자하문 초소(현 창의문 부근)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검문 검색을 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의 기지와 의심 어린 눈초리에 정체가 탄로 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군경의 신속한 소탕 작전으로 침투한 31명 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김신조)은 생포되었으며, 1명은 도주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박정희 목을 따러 왔다"는 김신조의 생생한 인터뷰는 국민들을 경악케 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우리 정부는 향후 북한의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기 위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 교육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주민등록증 제도 역시 이때 간첩 식별을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3. 죄 없는 주민들을 향한 학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68년)

1·21 사태가 일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968년 10월과 11월, 북한은 또 한 번 대규모 도발을 감행합니다.

이번에는 강원도 울진과 삼척 지역의 해안을 통해 무려 120명의 무장공비를 3차례에 걸쳐 침투시켰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 후방 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주민들을 선동해 게릴라 기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들의 거짓 선동에 속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하자, 당황한 무장공비들은 잔인한 본색을 드러내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이 발생합니다.

당시 강원도 평창군에 살던 이승복 어린이가 무장공비들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가 입이 찢기며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함께 현장에서 살해당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우리 군과 경찰은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여 침투한 공비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생포했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인과 경찰, 그리고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북한 정권의 잔혹함과 반인륜성을 여실히 보여준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4. 광복절 행사장 상공의 총성,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1974년)

1974년 8월 15일, 전 국민이 광복의 기쁨을 기념하던 장충동 국립극장 경축식장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을 치르던 도중, 박정희 대통령이 추념사를 읽어 내려가던 순간 객석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북한 공작원 문세광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저격 행위를 감행했습니다. 첫 발은 범인 자신의 허벅지에 오발 되었지만, 이어진 총탄들이 단상을 향했습니다.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신속히 대피해 화를 면했으나,

단상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어 대수술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당일 저녁 향년 49세의 나이로 서거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행사를 관람하던 장성환 양(당시 고등학생)도 교전 중 오발 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국가 경축 행사장 안까지 침투해 영부인을 살해한 이 사건은 온 국민을 엄청난 슬픔과 분노에 빠뜨렸습니다. 북한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간 지역이든 국가 공식 행사장이든 가리지 않고 테러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5. 대낮에 벌어진 도끼 만행,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사건 (1976년)

1976년 8월 18일, 평화로워 보이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에서 눈을 의심케 하는 야만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UN군 측(미군)과 한국군 장병들은 JSA 내 제3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작업(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전에 북한 측에도 통보된 정상적인 관리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되던 중, 북한군 박철 중위를 비롯한 수십 명의 북한군이 나타나 시비를 걸며 작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UN군 측 경비대장인 아서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 지시하자,
북한군들은 갑자기 우리 노무자들이 들고 있던 도끼와 몽둥이를 빼앗아 UN군 장병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낮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미군 장교인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가 현장에서 잔인하게 피살당했고,
한국군과 미군 장병 수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대낮에, 그것도 전 세계 시선이 집중된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도끼로 사람을 쳐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미국은 제2차 한국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데프콘 3를 발령하고, 핵 탑재가 가능한 B-52 폭격기와 항공모함을 한반도 인근으로 집결시켰습니다.
전쟁 직전의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공식적으로 유감 성명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가까스로 진정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판문점 내에서 남북 간의 격리 구역이 명확히 나뉘게 되었으며, 공동경비라는 개념도 사실상 무색해지게 되었습니다.

6. 외교 무대에서의 폭탄 테러,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북한의 테러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소에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형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오세아니아 순방의 첫 기착지로 미얀마를 방문 중이었고,
공식 일정으로 미얀마의 건국 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찾아 참배할 예정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 먼저 도착해 있던 한국의 공식 수행원들과 외교관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들이 사전에 묘소 지붕에 설치해 둔 원격 조정 폭탄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습니다.
이 끔찍한 폭발로 인해 현장에 있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교부 장관, 김동휘 상용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대한민국의 핵심 엘리트 외교관과 관료 17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셨고, 미얀마인 수십 명도 사망하거나 다쳤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차량 정체로 인해 예정보다 몇 분 늦게 도착하면서 화를 면했습니다.

남의 나라 신성한 국립묘지에 폭탄을 장치해 타국의 정부 요인들을 몰살하려 한 이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즉각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북한 대사관에 추방령을 내렸으며,
북한 정권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중추적인 인재들을 한날한시에 잃은, 우리 외교사상 가장 가슴 아픈 참사였습니다.

 

[1편 내용 정리] (기존 글의 1~6번 사건 포함)

  1.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비극, 6·25 전쟁의 시작 (1950년)
  2. 청와대를 노린 칼날, 1·21 사태 (1968년)
  3. 죄 없는 주민들을 향한 학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1968년)
  4. 광복절 행사장 상공의 총성,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1974년)
  5. 대낮에 벌어진 도끼 만행,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사건 (1976년)
  6. 외교 무대에서의 폭탄 테러,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길이가 너무 길어 2편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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